작성일 | 2019-07-17 | 조회 | 1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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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기념공원에서 지난 7월12일 오전 11시에 170여분이 참석한 가운데 제37주기 故리차드 위트컴 장군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발제 1 위트컴장군의 사상과 성장 배경/ 김재호 이사, 교수(위트컴 희망재단) 발제2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박주홍 이사 (위트컴 희망재단) 토론에는 신영하 소령(5군지사),Ellis 대령 (미 19지원사),오상준 정치부장(국제 신문)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부산의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1953년 11월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인해 하루 아침에 부산시민 29명이 사망하고,3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현재 화폐 가치로 1조 8000억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1953년 12월 5일자 '미 성조지' Pacific Stars and Stripes )"우리는 23,100개의 레이션을 제공하였고 매일 4파운드 음식,담요, 텐트 매트를 55보급창에서 조달 제공한다.3만여명의 화재민중 11,000여명에 천막촌을 우선 제공하였다.음식, 숙소, 의료에 대한 관심이 화재민에 제일 중요하다"고 PMP(Pusan Military Post)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말하였다. 그 이후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역설하여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한국인들을 위한 더많은 원조지원 약속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군은 이재민들을 위해 부산시 영도와 양정동에 400세대 규모의 화재이재민 주택을 건립했다. 1954년 위트컴 장군은 당시 목조건물(서대신동)이던 부산대학교의 부지확보와 대학건립에 대한 도움을 윤인구 총장으로부터 요청 받았다. 또한 피난민촌을 방문중이던 위트컴 장군은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이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수많은 환자들이 메리놀의원 앞에서 매일 긴줄을 서는 광경을 목격하며 열악한 한국의 의료시설을 개선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함께 병원을 건립하는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벌렸고,한복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금캠패인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부산에 메리놀 병원, 성분도 병원을 비롯해 여러 의료기관이 건립되었다.(한국국가기록원 위트컴 자료) 위트컴 장군은 퇴역 이후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간 영하 40도가 넘는 타국의 얼음땅에서 '마미'를 외치며 죽어간 미군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숙원이었다. 올해 리차드 위트컴장군 추모식은 정말 뜻 깊은 날이었다. 장군은 부산의 UN기념공원에 잠들어 계시지만 정신과 뜻은 영원히 계승되리라고 믿습니다 내년 추모식에는 장군의 동상 제막식도 함께 준비 중이라고 하니 그 날이 기대됩니다. 진선혜,방영숙 기자 jin6903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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