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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9-07-17 조회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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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기념공원에서 지난 7월12일 오전 11시에 170여분이 참석한 가운데 제37주기 故리차드 위트컴 장군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김재호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로 부터 장군의 약력과 업적을 경청 한 후, 다 함께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지고, 이어서 추모사가 있었다.
민태정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의 감사인사 그리고 폐회선언 후 장군의 묘역으로 이동하여 헌화 순서를 가졌다.


올 해는 협성건업에서 제공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 후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제1회 위트컴 장군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강석환 이사(위트컴 희망재단)의 사회 ,유엔평화기념관 박종왕관장 인사말 ,메리놀 병원 황선출 원장,(주)군월드 이동균대표의 격려사, 발제및 토론으로

발제 1 위트컴장군의 사상과 성장 배경/ 김재호 이사, 교수(위트컴 희망재단)

발제2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박주홍 이사 (위트컴 희망재단)
토론에는 신영하 소령(5군지사),Ellis 대령 (미 19지원사),오상준 정치부장(국제 신문)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부산의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UN기념공원에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장병들이 이곳 유엔묘지에 잠들어 있다.
총 16개국(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캐나다,프랑스,뉴질랜드,남아프리카연방,그리스왕국,벨기에,룩셈부르크,에디오피아제국,콜롬비아)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5개국(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라)에서 의료지원단을 보내주었다.약 11,000명의 전사자가 안장되어 있었지만, 유가족이나 본국 정부의 요청으로 유해 이장이 계속되어 현재 11개국 2,300구의 유해가 안장 되어 있다.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전쟁이 발발하여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사람들 중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군수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은 부산에 주둔하며 6.25 전 후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3년 7월27일 휴정협정을 맺은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돌보았다.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익선원)을 설립한 한묘숙 여사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고, 이후 부부는 평생을 전쟁고아를 돌보고 한국을 재건하는데 헌신했다.


1953년 11월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인해 하루 아침에  부산시민 29명이 사망하고,3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현재 화폐 가치로 1조 8000억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1953년 12월 5일자 '미 성조지' Pacific Stars and Stripes )"우리는  23,100개의 레이션을 제공하였고
 매일 4파운드 음식,담요, 텐트 매트를 55보급창에서 조달 제공한다.3만여명의 화재민중 11,000여명에 천막촌을 우선 제공하였다.음식, 숙소, 의료에 대한 관심이 화재민에 제일 중요하다"고 PMP(Pusan Military Post)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말하였다. 그 이후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역설하여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한국인들을 위한 더많은 원조지원 약속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군은 이재민들을 위해 부산시 영도와 양정동에 400세대 규모의 화재이재민 주택을 건립했다.

1954년 위트컴 장군은 당시 목조건물(서대신동)이던 부산대학교의 부지확보와 대학건립에 대한 도움을 윤인구 총장으로부터 요청 받았다.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대장(당시 미8군 사령관)을 설득해서 학교를 짓기 위한 장전동 일대 50만평의 무상부지 공여와 건축비용 25만불의 AFAK자금을 제공받게 하였으며, 예하의 미 공병부대로 하여금 진입로(온천장-장전동 부산대)와 학교부지 조성 공사를 직접 지원했다.  


또한 피난민촌을 방문중이던 위트컴 장군은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이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수많은 환자들이 메리놀의원 앞에서 매일 긴줄을 서는
광경을 목격하며 열악한 한국의 의료시설을 개선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함께 병원을 건립하는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벌렸고,한복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금캠패인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부산에 메리놀 병원, 성분도 병원을 비롯해 여러 의료기관이 건립되었다.(한국국가기록원 위트컴 자료)

위트컴 장군은 퇴역 이후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간 영하 40도가 넘는 타국의 얼음땅에서  '마미'를 외치며 죽어간 미군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숙원이었다.
장군은 장진호의 미군 유해공환을 위해 중국의 관계자들과 협의를 통해 아내 한묘숙 여사를 홍콩을 거쳐 ,중국, 북한으로 입국하여 북한 관계자와 협의하게 하였다.
1982년 향년89세로 위트컴 장군이 별세한 이후에도 '휘트컴 희망재단'을 설립하고,장군이 남긴 얼마간의 유산과 연금을 끊임없이 투입하며, 북한을 23차례나 방문해 미군 유해발굴과 송환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을 지속하다 2017년 1월,마지막 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장군의 못다 이룬 숙원인 미군 유해송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지금은 장군과 함께 잠들어 계신다. 그리고 부모님의  큰 뜻을 이어 받아 따님이신 민태정이사장이 위트컴 희망재단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 리차드 위트컴장군 추모식은 정말 뜻 깊은 날이었다.
장군은 부산의 UN기념공원에 잠들어 계시지만 정신과 뜻은 영원히 계승되리라고 믿습니다
내년 추모식에는 장군의 동상 제막식도 함께 준비 중이라고 하니 그 날이 기대됩니다.

진선혜,방영숙 기자 jin690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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