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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과 흥미진진한 세관이야기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님을 만나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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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0-13 조회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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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롤로그 #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님은 부산세관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셨지만 정년퇴직 1년여 앞둔 시점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해안선 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밀수경제사 등을 저술, 활동과 강연을 계속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은 초량왜관 연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시며 사람과 바다 세관 이야기 등을 여러 신문에 기고도 하였으며 부산항 이야기라는 책도 곧 출간된다고 하였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흔히 바다와 항구도시라고 한다. 부산항과 세관도 떼래야 뗄 수 없는 진귀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그런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가지고 있는 이용득 세관 박물관장님을 이달의 휴먼북으로 만나 뵈었다.




 부산의 개항과 함께 세관의 역사도 시작된다.

 우리나라 첫 번째 개항은 1876 부산항이다. 그 이후 원산항, 인천항 순서로 개항되었다. 개항과 함께 부산항의 역사는 시작되고 근대사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또한 1883년 6월 16일 인천해관이 개청하였고 그 이후로 원산해관 1883년 10월 31일 그리고 1883년 11월 3일 부산 해관이 만들어졌다. 부산해관이 개청한 날은 일본 메이지 천황의 생일이기도 하다. 초대 부산 해관장으로 영국사람 월리엄 넬슨 라바트였다. 초대 해관장은 이때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해관장의 가족은 부산항에 최초로 들어온 서양인 가족이 되었다. 그이후 1884년 앨런 선교사가 의료 활동을 위해 들어왔고, 그다음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왔다. 선교사가 들어왔다는 것은 기독교 개화의 물결이 급속도로 빨라지는계기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자, 개항과 동시 시급한 문제는 바로 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혈청소라는 검역소였고  지금은 송도 쪽에 있다. 

 부산항 변천과 세관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세관박물관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를 것이다. 중앙동 부산본부세관 3층에 가면 부산세관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이용득 휴먼북께서 세관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신 이곳에서 산 증인으로서 세관박물관이 그동안 헤쳐온 긴긴 역사와 해설을 방문객들한테 감동 있게 전달해주시고 계신다.

 부산세관박물관은 지난 1983년에 부산세관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관 관련 자료를 모아 문을 연 기존의 세관자료실을 확대 개편해 2001년도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세관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부산항의 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부산항이 어느 항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항구의 사진으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1부두 이야기부터 항만 이야기,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 초량왜관 부터 부산항 매립 이야기, 밀수이야기 는 정말 흥미진진하였다. 부산항은 수차례에 걸쳐서 거의 매립된 항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박물관의 전시형태는

1 .역사의장, 2 .이해의장, 3 .정보의장으로 나눠져 있다.

 먼저 "역사의장"은 개항전후의 부산항 모습과 개관이래 현재까지의 세관을 알 수 있는 전시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근대관세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무관세를 인정하여 세관이 없는 가운데 부산항을 개항하였다. 당시 개항장 관문은 옛날 초량왜관의 선창, 지금의 부산데파트 부근이었다.

 세관은 개항 7년 후인 1883년 11월 3일 지금의 동광동에 있던 일본인 가옥을 빌려 개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용미산 인근 2층 기와집을 지어 이전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는 청나라 직제의 영향을 받아 세관을 해관이라고 불렀다. 약 22년에 걸쳐 청나라에서 해관업무를 보던 유럽인들을 초빙하여 업무를 맡겼다고 한다. 해관시대 부산해관장은 6대에 걸쳐 임명되었는데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일본인 해관 장중 3대 해관장인 헌트 해관 장은 약10여년에 걸쳐 근무 하였다고 한다. 특히 헌트 해관 장은 부산항 개항 후 처음으로 물양장을 만들기 위해 용미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용미산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위치했었다해관 시대에는 주로 옛 초량왜관 선창을 중심으로 한 해안 일대가 부산항 역할을 하였다. 이후 통감부 시대가 도래 했고 다음해인 1907년 해관이 일본식 세관으로 바뀌면서 부산항의 중심축이 현 부산세관 청사가 있는 중앙동으로 옮겨졌다. 특히 1906년에 준공된 세관 공사 이후로는 세관을 기점으로 하여 시계방향으로 부두가 만들어지면서 오늘날 부산항 북항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부산세관은 부산항의 성장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항만의 역사를 써왔다. 그래서 부산세관을 이야기 할려면 부산항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고 그 역사 속에 부산항사와 지역의 향토사가 함께 숨 쉬고 있다.


 


 두번째 "이해의장"은 수출입 통관과 관련된 전시공간이다.

 개청 후부터 여러 가지 오래된 서류들과 낙관 통관서류들이 전시되어있었다세관은 관세를 받아들이고 수출입 업무를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재정수입과 대외무역 질서확립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관세가 재정수입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부산세관은 우리나라 최대 관문에 차지한 대표적인 세관으로 세수를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산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이러한 수출입 업무 지원의 현장이 바로 부산항이자 부산세관이다. 개항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문으로서 외국문물을 받아들였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민족의 수난과 함께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어내야만 했다.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발맞추어 우리나라 수출입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고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컨테이너 시대를 맞아 급격히 늘어나는 물류에 대비해야 했으며 1980, 90년대는 무역 자유화와 개방화 및 WTO 제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외역량을 높이면서 동시에 보다 신속 정확한 통관과 물류비용의 절감을 위해 세관행정의 전산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무역환경의 변화에 따라 세관 직원의 전문성이 요구되었으며 늘어나는 부산항의 물류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수출입 물품 통관관리를 강화하고 특히 국제 관련 협력이 중요시되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그동안의 외국 세관과 맺은 MOU를 바탕으로 외국세관과 직원 친선교류와 업무 유대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하였다. 

 세번째 "정보의장"이야기는 밀수관련 물품 반출 반입제한 품목 등의 전시공간이다. 

 관장님의 이야기는 시간 가는지 모르게 진행되었고, 밀수단속이라든지 배안에 밀수품을 넣어오는 공간을 전시해두었는데 신기하였다. 밀수를 해오는 다양한 방법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뉴스로만 보던 일들이 전시되어있어 정말 유익하였다. 세관직원들의 노고가 느껴지기도 한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때로는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밀수가 자행된다고 하였다.

 밀수의 사전적 해설은 관세를 회피하거나 금지품목을 수입 또는 수출하기위해 비밀리에 물건을 운반하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밀수가 쉽게 이뤄질 것이라 느낄 수 있겠으나 사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밀수는 아주 지능적이고 경제적이며 조직적이다. 또 상습성 기동성 국제성의 특징이 있다. 밀수행위는 국가와 사회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범죄로 취급된다. 그리고 관세 탈세는 국가재정 수입에 지장을 주고 국내산업의 성장 발전을 저해하여 국제수지악화와 무역질서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기도 하여 엄격히 다룬다. 밀수는 그나라의 정치 사회문화적 변천과 경제적인 여건 변화에 따라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밀수의요인 양상, 규모, 수법 등의 동태가달라진다.

 정부 수립 이후 사회의 혼란한 틈을 타서 자행된 밀수는 망국적 사회악이었다. 그래서 당시 세관원은 경제국방군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밀수의 시대별 흐름도 달랐다. 1950년대 이후에는 시계, 금, 안경 1970년대는 전자계산기, 소형라디오, 녹음기 1980년대는 의약품, 전자제품 최근에는 담배와 명품가방, 양주, 비아그라 등의 짝퉁이 밀수품으로 판을 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번 세관박물관을 찾아 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밀수 근절에 총력을 기울이는 세관 직원들의 노고를 조금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제 초석을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관장님께도 감사했다.

 급변하는 국제무역 환경 속에서 밀수는 날로 지능화 조직화 되고 있다. 특히 미국 9.11테러 이후 세관원들에게 안보감시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밀수단속 세관 기능에서 국가 사회보호 관세행정의 영역이 확대되는 등 질적 변화가 있고 지금도 세관원들은 관세 영역이 미치는 공항 항만과 시중에서 불법 무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였다. 세관직원들은 365일 우범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24시간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직접 몸담았던 이곳에  이용득 휴먼북의 이야기는 밤을 새워서라도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1910년 지어진 세관의 옛 건물인 빨간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맞은편 옛 부산역 건물과 부산우체국 건물은 3대 건축물에 들어갔으나 두 건물은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부산세관 건물은 1979년 6월 22일 부산대교의 건설과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공사로 철거되면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하였다. 건물 지붕위의 철탑은 지금 부산경남본부세관에 보관되어있다(아래사진임). 또한 부산이 대한민국의 대표 항구도시이지만 부산시민은 항구를 잘 모른다며 적기만이라는 지명이 지금 우암포인데 우암포구에 옛날 소바위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런 흔적들을 부산항의 상징물로 새기면 하나의 스토리가 될 수도 있는데 아쉬워  하였다. 부산시민이 바다를 체험 할 수 있는 해양문화를 활성화하고 해양 전문가들을 많이 키워 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용득휴먼북의 부산항 이야기라는 책도 곧 출판 될 예정이라 하니 그 책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이용득 휴먼북의  끝없는 그 열정에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옛날 세관 종탑


 편도욱, 송명옥 기자 wndhks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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