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조메뉴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바로가기

상담문의

베이비부머 칼럼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프린트

판문점 <자유의 송가>는 언제쯤 울려 퍼질까?

고객 소리함 게시판 읽기
작성일 2018-12-07 조회 1212
첨부

판문점 <자유의 송가>는 언제쯤 울려 퍼질까?

    

 해마다 12월이면 베토벤의 <심포니 No. 9 op. 125 ‘Choral’>, 속칭 합창 교향곡을 반복해 듣곤 한다. 벌써 오랜 습관이 됐다. 원래가 연말이면 많은 이들이 찾는 음악이기도 하다.

    

 기자가 연말, 이곡을 듣게 되는 데는 나름 각별한 사연이 있다. 1989119일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출신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8.25. ~ 1990.10.14.)이 그해 12월 브란덴부르그 야외 광장 등지에서 기념 연주회를 가졌다. 마침 그 기간 프랑스 출장이 잡혀 있었던 터라 며칠 휴가라도 내 꼭 연주회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출장길에 올랐다. 결국엔 프랑스 일정이 워낙 빡빡한데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연주회에 직접 가지는 못했다. 대신 전 세계로 실황 중계된 연주회 장면을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 뒷골목 펍레스토랑에서 볼 수는 있었다.


   


 이 연주회는 나중에 원제인 <Ode An die Freude, 환희의 송가(頌歌)> 대신 <Ode to Freedom, 자유의 송가>라는 타이틀로 녹음, 녹화돼 출시됐다.  

 환희의 송가 후반부 합창의 가사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중략)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하략)

*케루빔=cherubim, 귀여운 아기천사

    

 사실, 기자는 지휘자 번스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클라우디오 아바도,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등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날 맥주를 마시며 실황중계를 보는 동안 내내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며,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았는지 모른다. 이 한 번의 연주회를 통해 번스타인도 좋아하게 됐다. 마침 올해가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이다.

    

 딱히 탄생 100주년이 아니라도 올해는 유난히 그가 그립다. 198912월에 브란덴부르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자유의 송가>가 조만간 한반도 판문점에서도 우렁차게 메아리치길 고대하기 때문이다.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울림인가! 비슷한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독일이 한 순간에 합쳐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독일 통일은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곧바로 옛 소련의 해체로 이어지며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냉전체제가 허물어지면서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이 실현됐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미래학의 석학인 다니엘 벨(Daniel Bell)1960년 내놓은 철학서의 제목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전개를 예언한 통찰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및 수정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소련에서도 기술적 기능이 이데올로기에 우선하게 됨으로써 그 정당성이 상실될 것이라는 그의 혜안은 소련붕괴를 지켜본 기자에게 전율 자체였다.  



                         <이미지 출처=네이버 포스트>



 물론 아직은 판문점 <환희의 송가>를 기대하는 것이 너무도 섣부른 일일 것이다. 올해 중반까지 한껏 기대감을 가졌던 베이비부머 이상 세대들의 '내 죽기 전에'라는 장밋빛 그림도 그 빛이 많이 바래 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있지 않은가. 독일 통일도 첫걸음은 양쪽 사람들의 왕래였다. 사람들이 만나다보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도 종언을 고한 마당에 보수니 진보라는 프레임에 갇혀 또 다른 잔악한 현실을 만들고 있는 자들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편도욱 송명옥기자 solripan@naver.com  

    

댓글

  •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 타인을 비방하거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