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07-29 | 조회 | 1486 |
---|---|---|---|
첨부 | |||
초량왜관연구회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따라서 부산역사의 길 핵심투어 부산을 지키는 사랑 초량왜관연구회에서는 2019 글로벌 역사문화도시 부산 알리기(핵심)투어로 동래부사접왜사도를 따라서 동래부사 접왜사도는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관리가 초량객사로 행차하는 모습, 왜사 숙배식을 치르는 모습 일본사신을 위해 조선 측에서 마련한 연향의 모습 등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동래부사가 일본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초량의 왜관으로 행차했던길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공을 모신송공단과 부산첨사 정발(1553~1592) 장군을 모신 정공단을 거쳐, 초량왜관 설문을 지나 초량왜관삼대청(관수왜가,재판왜가,개시대청)과 응방,신당의 흔적을 찾아 역사의 경계와 변화의 의미를 되돌아 보기로 한다. 2019.7.26.(금) 2시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치안센터앞 동래부객사터 표지석에서 부산역사의길 투어를 실시하였다. 이번 첫 투어 해설은 초량왜관연구회 강석환회장님의 해박한 해설로 사전에 답사신청을 하신 4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먼저 동래(도호)부 동헌은 일명 아헌 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살림집을 내아 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도호부의 부사가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장소로서 이청, 무청, 향청, 등 각종 관아 건물 의 중심이 된 건물 로써 충신당, 독진대아문 망미루, 외삼문 고마청등 이 있는 곳으로 충신당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두번째답사 조선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으로, 대마도에서 온500여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 하였다. 조선 전기 왜관에 가족을 동반하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지 되었다. 부산에는 약 500년 동안 왜관이 있었다. 초량왜관은 1678년부터 1876년까지 약 200년 동안 존재하였다. 그 전에는 동구청 일대에 1607년부터 1678년 까지 두모포왜관이 있었다. 신관인 초량왜관과 달리 두모포 왜관을 구관이라 부른다. 동구에 남아 있는 고관이란 지명은 이 왜관을 가리킨다. 1601년부터 1607년까지 영도에 절영도 왜관이 있었다. 부산의 왜관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부산에 왜관이 설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407년 부터로 보고 있다. 자성대 부근에 있었던 왜관이 부산포왜관이다. 1407년 제포( 내이포. 웅천현)부산포 (동래현)가 개항되고, 1423년 염포가 다시 개항되면서, 삼포개항 왜관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전기에는 삼포가운데 제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하였다. 그다음 부산포 염포 순이다. 1544년 사량진왜변으로 부산포 한곳만 열리고 1547년 정미약조로 제포 포구왜관이 폐쇄되었다. 부산포 단일 포구. 왜관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래는 일본사신이 들어오는 첫 길목이자 유일한 공간 이었으므로 1547년 종3품 동래부사가 파견되는 지역으로 승격되었다. 부산에는 1407년부터 1876년 까지 470년 동안 왜관이 있었다. 초량왜관 공간은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동관 서관으로 나뉘어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는 부지가 10만평의 부지에 동관에서의 대표적인 중심건물을 동관삼대청이라고 하고, 서관에도 서관삼대청이 있었다. 동관, 서관 삼대청은 모두 조선에서 세운 조선식 건물이었다. 동관 삼대청은 초량왜관 안에서 제일 큰 건물인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이며 서관 삼대청은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 이었다. 이번 글로벌 역사문화도시 부산 알리기(핵심)투어는 2차8/23(금),3차9/27(금)4차10/25(금)5차11/22(금) 2차에서 5차까지 진행한다. 참여를 원하는분은 언제든지 신청가능하다. 초량왜관연구회 부산시 중구 충장대로 5번길 42 정원B/D501호 대표전화: 051-731-3400 사무국장 010-9329-0964 송명옥 기자 wndhks2000@naver.com |
댓글